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
성경말씀: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너희를 위하여 힘써 기도하여 …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로새서 4:10-14).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이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 (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된 것이다.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했을 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한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된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난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사도행전 1장 23절과 18장 7절, 두 번 나오는데 동일인지는 알 수 없다. 유스도가 어떤 일로 바울을 도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도 바울의 여러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맡은 일이 사소한
것이요,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심정으로 감당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할례당-즉, 유대인임을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믿음보다는 율법을 고집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못마땅히 여기고 반대하였는데, 이들은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다.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기에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심령을 무겁게 하였다. 그러나, 아리스다고, 마가와 유스도와 같이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기에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의 마음에 바라기는 더욱 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임을 깨닫고 동참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된 것이다.
에바브라는 “항상 너희(=골로새 성도들)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했다. 에바브라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줌이 필요하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이 나타난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고 했다. 골로새 교회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와 세상의 철학을 좇는 이단이 들어온 관계로 에바브라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다.
누가는 의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이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때에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다.
데마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갔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의 육신-겉사람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하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die every day).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갈 2:20). 해서,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아리스다고와 마가, 유스도, 그리고 에바브라, 누가, 데마, 눔바와 아킵보 등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던 일꾼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동역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열심히 잘 감당하였다. (마가와 같이) 과거에 실패한 자도
있고,
(데마와 같이) 장차 세상으로 떠나가는 자도 있다. 과거에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현재는 신실한 듯 하지만 믿음의 교만에 빠지거나 자고하여지는 사람은 나약해지고 허물 가운데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인생 그 자체는
연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은 그 바라봄과 의지함으로 인하여 완전하여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겸손한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환경을 이기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노라’고 고백하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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