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30, 2019

금욕주의와 하나님


금욕주의와 하나님


성경말씀:  “이런 것들(=금욕주의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2:23)

주전 300년부터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Stoicism)에 속한 사람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금욕은 하나님 밖에서 그들 철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믿음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Gnostics) 중에 일부(Saturninus가 대표적)와 마르시온주의자들(Marcionites)도 금욕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자처하던 이단들이었는데, 그들이 금욕의 삶을 산 것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절대적인 신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신, 소위 데미우르고스(Demiurgos) 라고 하는 신과는 다른 신이라는 그들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데미우르고스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자식을 갖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참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들을 만든 신이 데미우르고스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논리 속에 있는 절대적인 신에게 귀의하기 위하여 데미우르고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데미우르고스가 축복하는 결혼, 자녀증식과 고기 먹는 것을 금하고 철저한 금욕의 삶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창조자를 대처한 그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신은 다만 허상(虛像)일 뿐 그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은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칭하였지만, 창조주 하나님 밖에 머물고자 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체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르시온(Marcion)의 금욕을 요구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더 종교적이요 경건하게 보였는지, 마르시온의 교회와 교인수가 2세기 한때는 정통교회의 교세를 능가할 정도였다.

중세 수도원 생활을 하는 신부들과 수녀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힘썼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산다고 말하였지만, 그 안에 적지 않은 불륜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던 대신에 카톨릭의 계율 안에서 부자연한 종교행위를 한 까닭이다.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금욕적인 삶이 좋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규율이나 율법이나 자신의 신학에 속박되는 금욕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금욕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해지는 금욕은 신앙의 성장과는 무관하며,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하는 금욕은 그의 경건에는 전혀 무익한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사람이 음행의 잘못을 범하기 쉬우므로 그러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이때 예수님은 11-12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지킬 만할 때에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정욕의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때 이를 억지로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참는 것은 결혼함만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71-2절에서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권고한다. 각 성도의 가정이 신앙성장의 좋은 훈련장소가 되기를 바래본다.




나의 약함을 통한 하나님의 강하심


나의 약함을 통한 하나님의 강하심

성경말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노자는 낮추기(또는 겸손)를 잘하는 것의 대표로서 물을 들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66에 있는 말이다: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以其善下之)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故能爲百谷王)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是以欲上民)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必以言下之)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欲先民)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 (必以身後之)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못 느끼고 (是以聖人處上以民不重)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處前以民不害)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는다. (是以天下樂推而不厭)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투지 못한다.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물은 높은 곳에 두더라도 높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물의 이 속성은 짐짓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변할 수 없는 속성이다. 또한 물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모양이 없다. 네모난 용기에 담으면 네모난 모양으로 있고, 둥근 용기에 담으면 둥근 모양으로 있고, 울퉁불퉁한 용기에 담으면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있다. 그러나, 그 물이 산을 깎아 내리며 바위처럼 단단한 것을 부수는 힘이 있다.
물과 관련한 노자의 가르침은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주로 해당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원만한 처세를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겸손(謙遜)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치심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성도에게 물과 같이 아래로 처하고자 하는 겸손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힘을 발하여야 할 때, 물과 같이 거칠 것이 없는 기세도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12(또한 누가복음 1411)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0절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말씀한다. 자기의 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역사하신다. 우리에게 물과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춤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약함을 고백하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세상사람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의 의미와 교만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하나님 앞에 겸손이 좋다는 것은 많이 들어서 아는데 겸손해야 할 때 겸손하지 못하고, 담대해야 할 때 그렇게 함은 교만이라 여기고 겸손한 척 한다는 것이다. 겉모양으로는 겸손이 있는데 속으로는 상대방보다 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을 낫다고 여김은 겸손이 아니다. 다만 교만을 겸손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성경적인 겸손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과 세상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과 낮아짐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높아짐이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바래본다.



바울의 변명

바울의 변명 성경구절 : “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