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변명
성경구절: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19-21, 28)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의 목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를 포함한 몇몇 교회에서 거짓교사들의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이란, 바울이 전에 몇몇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수고비를
받지 아니한 것은 그의 말이 변변치 못하여서 그런 것이고, 빌립보 교회 등에서 그에게 생활비를 지급한 것은
그가 그들로 (그들의 형편이 되지 않는데도) 억지로 지급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본격적인 모금 캠패인을 벌이자, 바울의 반대자들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또한 밖에서 저가 그 많은 돈을
착복하기 위하여 저러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2장에서 그의 입장을 변론한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쓸 데 없는 일이었지만, 이로 인하여서 교회내에서 많은 교인들이 반대자들의 선동에 귀를 기울이고 많이 듣다
보니까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19)라고 교인들이 선동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주장을 따라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 선동가들,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그리스도의 몸되신 교회들을 위하여 수고한 자들이 아니다.
하기에, 바울의 마음은 더욱 더 안타깝다. 바울은 그들이 터무니 없는 것들로 그를 공격하매, 그의 육체적인 것들, 인간적인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한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고후 11:22-27).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말하거나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책임도 지지 못하면서,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한다.
바울은 그를 비난하는 선동가들, 거짓교사들이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바울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공격하여 그들이 바울보다 더 나은 선생이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그를 변변치 못한 설교가라, 그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다는 명목으로 교인들이 모은 돈을 가로채고 있다고 중상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바울은 11장 28-29절에서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말씀함으로
그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그 선동가들, 거짓교사들의 주장 가운데 맞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가지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울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더 부족한 사람들인데, 바울은 이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들이 비난하는 이런 부족한 것들,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씀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어떻게 바울은
그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씀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약함 가운데 온전하여짐’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온전히 섬기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주장하실 때 가능한 일이다.
바울의 약한
것들,
고난 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일 진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주님께서)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말씀을 맺는다.